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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겁 : 무한하나 유한한..人의 일상 - 이야깃거리/人의 이야기 - 글과사진 2020. 6. 18. 14:44반응형
카페 파도에서 찍은 고래 사진 어느 햇빛이 좋은 날, 포항 구룡포에 있는 "카페 파도"에 방문했다. 카페의 이름에 걸맞게 전면에는 드넓은 동해 바다가 펼쳐져 있고 카페의 아래 해변은 연신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잔잔한 날답게 파도소리는 청량했고 경쾌했다.
카페에 바로 들어가지 않고, 한참을 테라스에 서서 파도소리를 들으며 바다를 구경했다.
바다 중간중간 언뜻언뜻 보이는 흰 물결들 사이에서 어느 날 꿈속에서 본 그 큰 고래가 갑자기 쑥 하고 올라오지 않을까? 작은 설렘이 마음속에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원래 나는 고래를 좋아하지 않았다 솔직히 무서워했다. 어릴 적 후포항에 잡혀 피를 철철 흘리며 나뒹굴고 있는 고래를 본 이후로 고래는 나에게 정겨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때 고래의 사체에서 풍겨 나오는 역겨운 냄새와 잔인한 자태는 오랫동안 뇌리에 박혀있었다. 그런데 정말로 이상하게도 어느 날 꿈속에서 고래가 나타났다. 한창 수영을 배울 때라 깊은 물속에 자유롭게 유영하는 꿈을 자주 꿀 때였다. 날이 좋은 어느 오후의 단꿈 속에서 여느 날처럼 유유하게 수영을 즐기며 이곳저곳을 다니는데 물속 깊은 곳에서 정말 큰 고래가 쑤욱하고 나타났다. 단꿈이 악몽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왠지 그때 내 마음은 평안했다. 나와 함께 어울리기 위해 깊은 곳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다가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나타난 것만 같았다. 그 포근한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오랜 시간 깊은 물속에서 함께 헤엄쳤다. 헤엄치다 힘들면 잠깐 물밖에 고개를 내고 숨을 내뱉고 또다시 깊이 들어가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러다가 잠에서 깨고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고래의 평균수명은 70년이라고 한다. 수염고래과의 대왕고래는 최대 100년 이상을 산다고 한다. 후포항에서 본 그 고래는 몇 년을 살다가 그곳에 그렇게 버려졌을까? 꿈속에서 나와 함께 했던 그 고래는 얼마나 오래 나를 기다렸을까?
"카페 파도"에 들어서고 이곳저곳을 구경하다가 3층 어느 골방 벽에 걸린 고래 그림을 발견했다. 내 마음속 설렘의 파도를 뚫고 고래가 내 앞에 있었다. 설렘의 기쁨도 잠시, 뒤돌아 거울을 보다 거울 속에 비친 고래 그림을 보고야 말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거울에 갇힌 고래를 만났다. 거울 속 고래의 눈이 서글퍼 보였다. 후포항에서 만난 고래는 끝내 자신의 수명을 다하지 못했다. 내 꿈에 나타난 그 고래도 내 꿈이 끝나는 그 순간 사라졌다.
'억겁'에서 '겁'은 '어떤 시간의 단위로도 계산할 수 없이 무한히 긴 시간'을 의미한다. 그 앞에 '억'이 붙었으니 사실상 무한히 긴 시간이 '억겁'이다. 그러나 무한한 것이 어디 있을까? 저 사진처럼 100년을 넘게 살면서 드넓은 바다 이곳저곳을 모두 다녀봤을 것만 같은 고래도 언젠가는 시간의 테두리 안에서 소멸하고 만다.
저 사진이 "억겁"의 시간을 "찰나"의 순간으로 되돌려버렸다. 나에게 있어 "억겁"이 누군가에 있어 "찰나"가 될 수 있다. 나의 설렘의 끝이 눈가에 맺힌 눈물이 된 것은, 영원할 줄 알았던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으며 항존 할 것 같은 모든 존재가 한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됨을 알았기 때문일까?
무한하나 유한한 이 모순적인 삶이 거울에 갇힌 저 고래의 모습과 다를바가 없어 설레면서도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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